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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혀진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한다’ 토론회

기사 등록 : 2018-04-11 15:58:00

사람희망신문 webmaster@peoplehop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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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하는 토론회가 9일 오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토론회는 이종걸 의원(더불어민주당)과 사단법인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의 주최로 성사됐으며 이은숙, 이규숙 모녀, 한도신, 김성녀 등, 4명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이날 토론회는 항일여성독립운동가의 직계 자손들의 생생한 구술을 통해 인물들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종걸 의원(조모: 이은숙, 고모: 이규숙), 김동수 박사(미국 버지니아 노포크 주립대, 모: 한도신), 최성주 공동대표(언론개혁시민연대, 조모: 김성녀)가 발표자로, 신영숙 기획위원장(사단법인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김정아 전문관(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이 토론자로 참석했다.


시작에 앞서 내빈으로 참석한 심덕섭 국가보훈처 차관은 “내년이면 3.1운동 100주년이다. 독립이라는 현실에는 남녀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관련된 기존 자료가 남성 중심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여성독립운동가 중에는 독립운동을 하셨음에도 이름이 나타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작년 8.15 광복 기념식에서 대통령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앞으로는 이런 분들에 대해 의지를 갖고 발굴해 서훈, 포상하고 기록을 후세에 온전히 전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라는 축사를 전했다.


모녀가 함께 걸었던 항일독립의 길 – 이은숙, 이규숙


 ▲ 이종걸 의원   ⓒ사람희망신문
▲ 이종걸 의원   ⓒ사람희망신문


이은숙 여사는 남편이던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을 뒷바라지 하며 활동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계기로 서울의 명가였던 이회영 선생 일가는 전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해 신민회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이어갔는데, 이는 이은숙 여사의 결혼 2년 만의 일이었다. 당시 이회영 선생 일가가 건립한 신흥무관학교는 독립운동 최대의 인재 양성소였다.


신흥무관학교가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이회영 선생 일가는 서간도를 떠나 베이징에 자리를 잡았다. 이 때 밀정 김달하 암살 사건이 일어났는데, 신채호와 김창숙이 “우당 내외가 김달하 문상을 다녀왔으니 앞으로 절교하겠다”라는 편지를 보내 온 일이 있었다. 이에 격노한 이은숙 여사는 칼을 품고 신채호와 김창숙을 찾아가 “우리 영감이 김달하 집에 조상간 것을 보았느냐?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 줄 알며 말이면 다하는가? 우리 영감의 굳세고 송죽같은 애국지심을 망해놓으려하는 놈들, 바로 말 아니하면 이 칼로 너희 두 놈을 죽이고 가겠다”라고 일갈해 신채호와 김창숙이 꼼짝 못하고 자신들의 경솔함을 사죄한 일화도 있었다. 


이은숙 여사의 딸인 이규숙 여사는 10대 때 이미 만주 독립군 활동 현장에서 성장했다. 그는 동지들의 활동 지원사업에 가담했다. 영어와 북경어에 능통해, 중국인으로 가장하면서 북경에서 모았던 무기, 탄약, 수류탄 등을 만주독립군 기지로 옮겼다. 이 무기들은 국내 일본요인 암살, 관공서, 경찰서 폭파 등에 사용되었다. 이규숙 여사는 아버지의 뒤를 이은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중국 전역을 누비며 지하에서 투쟁하면서 해방을 맞이했다.


한편, 이은숙 여사는 1925년 일부 자녀들을 데리고 생활비라도 마련해 볼 생각에 서울로 귀국했다. 친척집 대소사에서 허드렛일 등으로 어렵게 돈을 마련해 베이징에 부치곤 했으나 1932년 안타깝게도 우당 이회영 선생은 여순감옥에서 일제에 의해 고문 끝에 옥사했다.


이어 1935년, 아들 이규창 선생도 친일파를 처단해 13년 형을 언도받고 수감되었다. 이은숙 여사는 삯바느질 등을 해주고 조반석죽으로 살며 아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이규창 선생은 해방 후 석방되었다.


이은숙 여사의 저서 <서간도 시종기>의 집필은 1966년 완료됐다. <서간도 시종기>는 제1회 월봉저작상(1975) 수상작이며, 해제를 쓴 역사학자 윤병석은 “이 책은 예사 회상기가 아닌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한 면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언급한 사료적 가치가 높은 저술이며, 전통적 한국 귀부인의 교양과 생활, 의지를 절실하게 묘사한 작품”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나라사랑의 가시밭길을 걸었던 어머니 한도신


한도신 여사는 1895년 평안남도 고평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엄격한 반일 기독교 가풍이었다. 


평양 숭실 학생이던 김예진과 결혼한 한도신 여사는 남편이 1919년 평양 만세운동을 준비할 시 수백개의 태극기 만드는 것을 밤새 도왔고 선두시위를 위한 대형 태극기도 직접 제작했다. 임시정부에서 남편에게 연락이 왔을 때는 자금을 마련해 남편의 상하이 망명을 지원했다.


한도신 여사는 이후 독립운동 조직의 요청으로 평양시에서 격문을 돌렸으며, 시부모의 지시로 상해 임시정부 활동요원 4명을 자택 내실에 숨기고 숙식을 제공하며 돌보기도 했다. 대한독립군의 지령으로 1920년 여름에 고국에 밀입국해 활약하던 남편을 도와 폭탄을 운반하기도 했고 남편의 행방을 추적하던 경찰과 논쟁을 하다가 심한 폭행을 당하기도 했지만, 같은해 8월 남편 김예진과 동지 문일민, 안경신의 평안남도 도청 폭파는 성공할 수 있었다. 이 폭파사건은 미국 국회의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의지를 알리는 연쇄 작전계획의 유일한 성공 사례였다.


1926년에는 영국전차회사 검표원이었던 김예진이 과거 평안남도 도청 폭파사건 의혹으로 조선으로 강제송환되자, 주권이 없는 일본 속국 망명자로 무시해 남편의 체포에 협조한 영국전차회사를 상대로 5개월간 투쟁을 벌였다. 결국 영국전차회사로부터 사과문, 보상금, 조선 종업원 무해고와 밀린 임금 즉시 지불 등의 약속을 받고 귀국했다. 후에는 남편의 잦은 예비검속과 신사참배 반대에 따른 탄압에 못이겨 1942년 8식구가 만주로 이주했다.


해방 후에는 남편이 개척한 후암교회의 초대목사 사모로 봉사하고 북에서 피난 온 친척과 친구 가족들이 정착하도록 도움도 주었으나, 6.25때 북한에 의해 남편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이후 자녀들이 모두 고등교육을 마치도록 돌보았으며, 1960년대에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찾아 돌보았다. 1962년 남편 김예진 목사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추서받았으며 본인은 1963년 5월 5일 서울시로부터 모범어머니상을 수상했다.


한도신 여사의 자녀 김동수 박사는 “나의 아버지가 위대한 애국투사이고 충성된 기독교 목사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가 그런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뒤에서, 옆에서, 그리고 멀리서 밀어주고, 도와주고, 돌보아 준 어머니 덕이라고 믿는다”라며 한도신 여사의 용기와 지혜, 당당함을 회상했다.


만주 항일 무장독립군의 어머니 김성녀


189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김성녀 여사는 1907년 항일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건국훈장 애족장 수훈)과 혼인했다. 최운산 장군의 형제는 형 최진동, 아우 최치흥 삼형제가 함께 독립군을 이끈 장군이었는데, 이후 김성녀 여사는 항일 무장투쟁의 가장 중심에서 독립군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충실한 배후세력이 된다.


최운산 장군과 김성녀 여사는 1910년 경술국치 후 무장 독립군기지 건설이라는 뜻을 품고 봉오동으로 이주했다. 1912년부터 100명 이상의 사병부대가 최운산 장군의 사비로 운영되기 시작했는데, 소문을 듣고 더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와 이는 독립군의 모체가 된다. 김성녀 여사는 병사들의 식사를 책임졌고 군복을 지어 입히며 부대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당시의 활약상은 독립운동가 출신 역사가 이강훈의 저서 <무장독립운동사>에 잘 나타나 있다. 또 <한민족독립운동사>는 당시 군복은 한인사회 부녀자들이 제조했다고 기록했는데, 김성녀 여사는 당시 한인사회 부녀자들의 총책임자였다. 최운산 장군의 부재시 급한 정보를 전달해야할 때는 본인이 직접 본영진지에 연락한 것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돼 퍼져나간 기미독립선언은 간도, 미주지역 등 국외로도 확산되었다. 간도의 유지로 독립군을 양성하던 최운산 장군 형제들도 간도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김성녀 여사도 일가친척과 마을 부녀자들을 독려해 동참했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 최운산 장군은 기존 부대였던 도독부를 모체로 대한민국 첫 정식 독립군부대인 ‘대한군무도독부’를 창설했다. 광복단 초대 단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친형 최진동 장군을 사령관을 추대하고 최운산 장군 본인은 참모장으로, 친동생 최치흥 장군은 참모이자 전략가로 각자 소임을 맡았다.


이후 1920년 ‘대한북로독군부’군을 연대별로 주둔시켜 대승을 거둔 것이 봉오동전투이다. 이 전투의 이면에는 최운산 장군의 오랜 준비와 동반자인 김성녀 여사의 헌신적인 노력이 곳곳에 배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당시의 전황은 김성녀 여사의 기록에 자세히 나와있다.


김성녀 여사의 손녀인 최성주 공동대표는 “김성녀 여사는 조국광복을 염원해 부녀들을 동원, 3.1운동에 참여하고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북로독군부 독립군의 살림을 돌보며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첩보활동의 한 축을 맡아 담당했음에도 그 활동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며, 김성녀 여사의 삶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을 계기로 후대가 사표로 삼을 수 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 축사하는 심덕섭 국가보훈처 차관   ⓒ사람희망신문
▲ 축사하는 심덕섭 국가보훈처 차관   ⓒ사람희망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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