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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가면 돈 벌 수 있다고 속여 노예로 만든 일본군

기사 등록 : 2016-11-25 09:43:00

이국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사무국장 road8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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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해방되지 못한 소녀들‘여자근로정신대’를 아시나요?
[사람희망신문]양금덕(87) 할머니가 당시 일본인 교사와 교장의 거짓말에 의해 일본으로 강제동원 된 것은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5월말.

일본은 고갈된 전시 노동력 보충을 위해 대규모의 인력동원을 본격화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급기야 13세, 14세의 어린 초등학교 여학생과 미성년 소녀들까지 그 희생양으로 삼았다.

 ▲ 광주전남에서 동원된 10대 어린 소녀들이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 기숙사에 도착하는 모습(1944년 6월)   ⓒ사람희망신문
▲ 광주전남에서 동원된 10대 어린 소녀들이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 기숙사에 도착하는 모습(1944년 6월)                                                       ⓒ사람희망신문

 

당시 전남 나주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던 양금덕 할머니는 일본인 교장과 담임선생으로부터 “일본에 가면 상급학교에도 진학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며 일본에 갈 것을 거듭 종용받았다.

배고프고 가난하던 시절,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는 제안은 배움에 목마른 어린 소녀들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동원 대상은 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거나, 막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사 일을 돕고 있던 13~15세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심지어 12살 어린 아이들까지 있었다.

목포, 나주, 광주, 순천, 여수 등 전남지역 5개 도시에서 동원된 이들은 여수에 집결한 뒤 연락선을 타고 다음날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했다.

이어 대표적 공업도시인 나고야로 이동한 뒤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 배치됐다.

 ▲ 미쓰비시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 동원된 어린 소녀들의 작업 모습   ⓒ사람희망신문
▲ 미쓰비시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 동원된 어린 소녀들의 작업 모습 

 


  당시 나고야는 일본 최대의 군수공장 밀집지역으로,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는 당시 군용 항공기(정찰기)를 제작하고 있었다.

나고야 미쓰비시중공업 항공기제작소에는 광주전남 150여명 이외에도 충남지역에서 동원된 150여명 등 약 300여명의 소녀들이 동원됐다.

그리고 이들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굶주림과 혹독한 감시 속에 하루 8~10시간 동안의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정부 조사 자료에 의하면 1944~45년 경 이런 식으로 동원된 작업장은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약 300명), 후지코시 강재공업 도야마 공장(약 1,089명), 도쿄 아사이토 누마즈 공장(약 300명) 세 곳이다.

그러나 위 3개 기업 외에도 다수의 기업이 한국 소녀들을 여자근로정신대로 동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고픔과 중노동에 내 몰린 소녀들

부푼 꿈을 안고 일본에 도착했지만 어린 소녀들이 마주했던 것은 책상과 노트가 아니었다.

동원된 소녀들은 출신지별로 중대, 소대 등 군대식 편제로 관리되었다.

일상생활은 철저히 통제되었다.

고향에 편지를 쓸 수는 있었지만 내용은 모두 사전에 검열을 받아야 했다.

그렇다보니 매번 ‘잘 먹고, 잘 지내고 있다’는 말 이외엔 쓸 말이 없었다.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로 동원된 소녀들은 주로 비행기 부품제작, 본뜨기, 페인트 칠 작업 등을 담당했다.

군수공장에서의 노동은 혹독했다.  그날그날 작업량이 강제로 할당돼 있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할 경우 곧 심한 질책이 쏟아졌다.

열악한 환경과 할당량을 채우기 위한 무리한 작업 때문에 그만큼 부상도 잦았다.

김성주(1929년생) 할머니의 경우 선반작업 중 사고로 왼손 집게손가락이 절단되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부상을 당하거나 몸이 아프다고 해서 일을 빠질 수는 없었다.

일을 하지 않으면 그날 밥을 주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특히 배고픔이 문제였다.

한참 자랄 나이인데다 하루 종일 고된 노동에 매달렸지만 주어진 식사라고는 보리를 섞은 밥 약간에 반찬 한 가지가 전부였다.

반찬이라고는 매실을 절인 것이나 단무지 한 쪽이었고, 된장국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나왔다.

허기를 견디다 못한 소녀들은 물로 헛배를 채워야 했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증산’ 당부 억울한 죽음마저 미화

1944년 12월 7일 점심시간이 끝나고 막 오후 작업에 들어갈 무렵, 도난카이(東南海) 대지진이 나고야 일대를 강타했다.

나고야 미쓰비시 공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인을 포함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런 가운데 전남출신 6명의 소녀들이 안타까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미처 공장을 빠져 나오지 못한 채 건물더미에 깔린 것이다.

그런데 일제는 이 억울한 죽음마저 전시 홍보를 위해 ‘미화’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1944년 12월 23일자 2면에 ‘열렬 유언에도 증산’이라는 제목으로 목숨을 잃은 목포에서 동원된 서복영, 오길애의 사망 소식과 함께 장례에 관한 얘기를 크게 소개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소녀들의 억울한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신문은 특히 사망 이후 유골 반환 소식과 함께 가족의 반응을 싣고 있는데 그 내용이 참 충격적이다.

신문에서는 서복영 아버지의 말을 인용해 “그 애가 순직한 것은 명예로 생각합니다.

아비로서 이 이상 없는 효도를 바쳤다고 기뻐합니다”라고 하는가 하면, 오길애 아버지의 말을 빌려 “나라를 위해 일한 것은 일가의 명예입니다.

지금부터 세상을 떠난 그에게 지지 않도록 나도 국가에 봉공하겠습니다”라고 소개했다.

과연 딸의 죽음을 두고 “아비로서 이 이상 없는 효도를 바쳤다고 기뻐”하거나, “나라를 위해 일한 것은 일가의 명예”라고 말했을까.

이처럼 일제는 죄 없는 어린 소녀들의 죽음마저 전쟁에 지쳐있는 일본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증산을 부추기기 위한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던 것이다.

약속했던 임금 역시 지급되지 않았다.

‘다달이 적금해서 나중에 지급하겠다.’고 하거나 ‘조선에 돌아가면 나중에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결국 모두 거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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